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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소식 프로그램24년생 이이효재를 만나다
- 일시
- 2019.11.14(목) 오후6시
- 장소
-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 공용회의실
생애사 아카이빙 토크쇼 <24년생 이이효재를 말하다> 후기
24년생 이이효재를 만나다
11월 14일 목요일. 1924년생 이이효재 선생님이 태어난 날입니다.
같은 날,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에서는 이이효재 선생님을 듣고, 말하고, 추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작은 토크쇼가 진행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머리에선 생생한 기억으로 떠오르고, 또 누군가의 머리에선 상상 속의 인물로 나타났을 24년생 이이효재 선생님의 삶과 이야기를 패널분들의 말을 통해 풀어볼까 합니다.
토크쇼의 문은 진행을 맡아주신 김금옥(전 문재인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비서관) 선생님이 열어주셨어요.
“사실 오늘 11월14일은 24년생 이이효재 선생님의 생신입니다. 저희가 선생님 생신 즈음해서 가끔 찾아뵙기는 하는데.., 이렇게 찾아오는 게 싫어가지고 생신 때 피신을 가신 적도 있으세요. 그랬던 기억이 갑자기 나네요. 어쨌든 제가 오늘 이렇게 선생님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자리에 사회를 맡게 돼서 저는 개인적으로 정말 감격스럽고 영광스럽습니다.”
김금옥 선생님의 짧은 소감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주실 패널 세 분의 소개가 이어졌습니다.
좌측부터 김금옥, 남인순(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지은희(전 여성가족부 장관), 강인순(경남대학교 교수) 선생님이십니다.
지은희(전 여성가족부 장관)_ 교수 이이효재를 말하다.
#‘감격시대’ 이이효재, 인간 이이효재
“이효재 선생님은 인간에 대한, 개별 인간에 대한 관심, 삶에 대한 관심이 정말 남다르세요. 예를 들어 제자들이 비슷한 질문, 똑같은 질문을 하러 와도, 똑같은 질문에도 끝까지 진솔하고 진지하게 대답해주셨어요. 전 그런 분을 처음 봤어요. 그때 너무나 많은걸 배웠어요. 그런데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제, 새로운 연구 영역을 만나도 똑같이 그렇게 심취하세요. 그래서 저희가 지어드린 별명이 뭐냐면 ‘감격시대’예요.”
‘감격시대’ 이이효재 선생님은 이러한 사람과 연구 주제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통해 빈민과 노동을 비롯한 영역까지도 집중하여 연구하고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루에 5,6시간씩 책을 읽으셨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시죠?
이이효재 선생님은 학자로서 연구뿐만 아니라 운동가로서 활동도 지속적으로, 교수 퇴직 이후에도 하셨는데요, 그러한 활동의 여러 동기 중 하나를 지은희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하셨어요.
“선생님이 어떻게 보면 삶의 계기 마다 빚진 것처럼 생각하시는 게 있어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분의 의식 구조는 뭐냐면, 당신은 운이 좋아서 학교도 가고 그랬는데, 같은 시대에 여성들이 정신대 끌려갔다는 것에 부채 의식이 굉장히 심하셨어요. 그래서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의식. 그리고 또 하나는, 선생님이 47년인가 48년에 미국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셨는데, 6.25전쟁 시기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현실에 당신이 없었다는 사실에 굉장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래서 분단 문제, 평화에 아주 깊은 의무감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게 선생님이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게 한 힘이었어요.”
#분단 시대의 한국 여성의 현실을 고민한 학자 이이효재
이이효재 선생님은 75년 멕시코 첫 세계여성대회에 참가하시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의 분단 현실과, 민주화 그리고 여성해방을 연구하시기 시작하셨다고 해요.
제1회 멕시코 세계여성대회에서는 1세대 여성이론을 뛰어넘어서, ‘민족의 해방과 그에 따른 여성의 해방’을 외쳤다고 해요. 한국에 돌아오셔서는 분단국가로서의 한국과 이 안에서의 여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이죠. 그 전에 지속하시던 가족 연구에서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 여성의 역할과 해방’로 연구 주제가 확장된 것이죠.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1979년)이라고 합니다. 한 번 읽어봐야겠지요? (지은희 선생님의 추천!)
또 당시의 사회학이 미국에서 직수입된 이론으로, 한국을 분석하는 데 부족함을 느끼셨다고 해요. 통일되지 못하고 강제로 분단된, 이 시대적 상황을 구조적으로 연구하고, 이론화하고 또 분단 시대가 우리의 삶과 가족, 사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셨다고 해요. 그렇게 탄생한 책이 <분단시대의 사회학>(1985년)이죠!
“몇 가지 중요한 계기마다 선생님의 기본적 컨셉이 바뀌시고, 패러다임을 바꾸시고, 실천하시고 또 그것을 제자들에게 날마다 얘기하셔서 제자들도 안 변할 수 없도록 하시고.”
지은희 선생님과 이이효재 선생님 사이에는 50년이라는 시간이 있다고 해요. 그 50년의 시간 속의 이이효재 선생님을 다 전해 듣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지만, 짧은 이야기 속에 그려지는 이이효재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과 열정, 고민을 충분히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어요.
남인순(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_ 운동가 이이효재를 말하다
# 따뜻한 미소의 선구자 이이효재
“이효재 선생님의 특유의 미소가 있으세요. 그 미소로 참 힘들지? 이러면서 따뜻하게 등을 만져줬던 기억. 그게 굉장히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굉장히 멋있으시잖아요. 후배들을 격려하는 따뜻한 미소. 이것이 참 생각이 납니다.”
여성운동의 현장에서 후배들에게 항상 따뜻한 미소와 격려를 보내셨던 이이효재 선생님은 항상 새로운 것을 많이 도전하셨다고 해요.
여성이 주도하는 평화운동에도 앞장서셨고, 정대협도 이끄시고, 언제나 선구자 역할을 하셨던 거죠. 호주제 폐지의 문화운동의 일환인 ‘부모성 함께 쓰기’ 제1호 선언자도 이이효재 선생님이셨다는 사실!!
남과 북을 넘어선 아시아 평화를 위해 여러 나라를 오가며 토론회와 간담회를 개최하시고, 연대와 교류의 장을 만들어내셨던 이이효재 선생님을 보며, 남인순 의원님은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이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고, 이이효재 선생님의 뒤를 이어 평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명감 또한 다시 깨닫게 되셨다고요.
# 손편지로 마음을 전하던 진보적 운동가 이이효재
“여성운동가로서 항상 진보적인 가치를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은 이효재 선생님으로부터의 큰 배움이었고, 제가 지금 정치인으로서 잃지 말아야 하는 초심을 지켜주시는 그런 분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이효재 선생님은 여성운동에 있어서 결과적으로 권력관계의 전환을 시켜내는 것이 목표이기도 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말씀하셨다고 해요. 제도 정치에 한계가 있어도 들어가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셨던 것이죠! 그래서 남인순 의원님이 제도정치권을 갈 것이냐, 말 것이냐 고민하실 때에도 이이효재 선생님께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고 해요.
남인순 의원님의 책상 아래에는 7년 전 이이효재 선생님께서 보낸 손편지가 끼워져 있다고 하는데요, 여성운동을 했던 정치인으로서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적어 보내셨다고해요. 지금까지도 남인순 의원은 하나의 좌표로 생각하며 매일매일 보게 된다고 하셨어요.
이이효재 선생님이 주도하셨던 평화운동을 돌이켜보면, 오히려 지금의 우리가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인순 의원님 말씀처럼, 이이효재 선생님의 뒤를 이어 우리가 앞으로 해결해야하는 과제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인순(경남대학교 교수)_ 이이효재, 퇴임 이후의 행보를 말하다
# 지역사회의 주인은 여성이다 # 협동조합, 공동체
“지역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느냐? ‘지역사회 주인은 여성이다’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여성들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조직하기 위한 작업을 하셨는데, 그 작업의 계기가 됐던 것이 ‘기적의 도서관’이에요. 기적의 도서관을 유치해서 어린 아이들 동화책 읽어주시고 아이들하고 놀고, 옛날얘기도 해주고 하셨죠. 그다음에 또 그 연세에도, 경남 여성회분들이 찾아와서, 선생님 우리 여성운동 공부를 하면 좋겠다… 그래서 책 읽는 모임을 하자고 해서 책 읽는 모임을 2~3년을 하셨습니다. 서울지역에서 했던 일을 그대로 규모만 작지, 그대로 하셨다고 이해하시면 되고요.”
이이효재 선생님은 퇴직 후 진해로 내려가셔서도 지역사회와 여성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으셨어요. 그 중 ‘기적의 도서관’ 건립은 이이효재 선생님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요, 진해 기적의 도서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도서관 건립에 핵심 역할을 수행하셨죠.
여기서 이이효재 선생님의 큰 그림이 나오게 됩니다. 이 도서관에 어린이들과 함께 오는 부모를 주목한 것이죠. 부모 대상의 교육을 실시하고, 활동을 조직하는 일들을 시작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그 활동들이 새끼를 쳐 장난감 도서관 활동, 협동조합 형태의 방과 후 학교도 운영하셨다고 합니다.
퇴직 후에도 끊임없이, 지역사회 여성의 사회적인 활동과 역할의 중요성을 외치시고 직접 실천하시며 활동하신 선생님의 삶이 경이로울 정도였어요.
34년생 조화순 목사가 들려주는 이이효재 이야기
토크쇼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오늘 참가자들 중 가장 연로해 보이시는 분이 입장하셨어요. 그 분을 보자마자 지은희 선생님은 화들짝 놀라셨고, 장내는 잠깐 소란스러워졌어요.
한국 노동운동의 대모 조화순 목사님이셨어요.
“그때 유신이 발표됐을 때예요. 그래서 제가 안기부로부터 도망다니다가 이이효재 교수님 댁에 갔어요. 그랬더니 이 양반이 돈을 주면서, 교수들이 여름에 쉬는 장소가 있대.
아무도 모른대. 거기는. 거기 가서 몰래 도망가서 있으래요. 설악산 있는 쪽이에요. 거기 가면 밥 할 수 있는 도구가 다 있어. 가서 숨어있으래. 그게 생각나네요. 그래서 제가 거기에 가서, 숨어있었던 생각이 나요.”
오랜 친구의 기억 속의 이이효재 선생님은 역시나 이이효재였습니다. 지은희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그 분의 돈을 받지 않은 제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셨다고 해요.
조화순 목사님은 이이효재 선생님과 함께 노후에 여성공동체를 꿈꾸며 땅 산 일화를 들려주시기도 하셨어요. 주변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함께 돈을 모아 토지를 샀으나 사람이 살 수 없는 맹지였다고 해요. 여성 50여명이 돈을 모아 산 땅이 아직까지 그냥 맹지로 있다고 하니, 참 웃픈(?) 일화였어요 🙂
2시간 남짓의 시간은 이이효재 선생님의 삶을 들여다보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선생님을 전하는 패널분들의 목소리와 표정, 분위기만으로도 이이효재 선생님의 따뜻하고 치열했던 삶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저 한 분의 위인의 삶을 들었을 뿐이었지만, 그 분의 삶은 분명 현재의 우리와 이어져 있으며, 그때의 이야기와 지금의 이야기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고, 동시에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들의 무게 또한 느낄 수 있었답니다.
“이이효재 선생님을 잘 알지는 못하고 왔어요. 저는 들으면서 이 대단한 분을 왜 이제서야 알았을까? 이 분은 정말 역사이시구나. 산 역사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오늘 생애사 아카이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했는데, 조금 더 이이효재 선생님을 계속 알아가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92년생 참가자의 소감 中 –
놓치면 안 되는 토크쇼였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본 토크쇼를 아쉽게 놓치신 분들은!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로 오시면 됩니다. 이이효재 선생님의 삶을 기사 중심으로 정리한 전시회가 내년 3월 27일까지 진행될 예정이에요! 오셔서 전시를 통해 선생님을 잠깐이나마 만나보시고, 굿즈도 챙겨가시길 바랍니다 🙂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는 앞으로도 이러한 위대한 분들의 삶을 듣고, 배우는 기회를 만들도록 열심히 활동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릴게요!
지금까지 생애사 아카이빙 토크쇼 <24년생 이이효재를 말하다> 후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