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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를 돌아보며, 우리는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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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를 돌아보며, 우리는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는가?”

일시
2019.11.9. 14:00-17:00
장소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 솜

“90년대를 돌아보며, 우리는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는가?”

 

11월 9일 여성운동의 계보잇기 사업으로 <90년대 페미니스트 동창회>(이하 ‘동창회’)가 진행되었어요. 90년대 페미니스트 동창회는 다양한 인물들의 생애사를 통해 여성운동의 계보를 이어가며 세대 간 연결을 시도하고 있는데요.

작년 9월, 신촌을 무대로 활동했던 영페미니스트들의 동창회에 이어 올해는 90년대 서울지역 대학 내 여학생들의 학생운동과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보았습니다.
90년대 활약한 페미니스트 개인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되어가고 있는가”를 같이 나누어보며 여성운동의 한 흐름을 공유하고자 했어요.
(작년 동창회 후기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후기링크

먼저 현재 경희대 교수로 재직중이고 활동가 출신 교수이신 ‘91학번 엄혜진 님의 이야기로 문을 열었어요.

<“저는 따까리도 했지만 짱도 제가 먹었다는 거예요” >

“91학번부터 94~95학번까지는 이른바 구좌파 운동, 이러한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몰락한 이후에 어떤 새로운 전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모색해야 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어요. 87년 이후에 확장된 민주화 운동의 공간과 시너지가 대학 사회에서 엄청나게 대중운동으로 활성화돼요. 그 당시 대학 사회를 운동권들이 정치적 헤게모니뿐만 아니라 윤리적 헤게모니도 장악했던 시기인 거죠”

“나는 되게 헤게모니 집단, 정치적으로 윤리적으로 헤게모니 집단이고 나는 리더이고 이런 가운데 대학을 졸업했다는 겁니다. (중략) 제가 말단으로 들어갔는데 선배들이 예뻐했어요. 예뻐했는데 정말 ‘예뻐’만 한 거야. 뭐냐 하면 어떤 중요한 의제에 대해서 뭔가 맡기고 이런 거 있잖아요. 이런 것을 내가 아니라 나랑 같은 동기의 다른 남자 활동가들한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이게 나로서는 낯선 경험입니다. 내가 낯설다고 경험한 건 여중여고여대를 나왔기 때문이에요. 내가 대학을 나오면서 대자보도 내가 붙였지만 연설도 제가 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따까리도 했지만 짱도 제가 먹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회를 나갔더니 나한테 따까리만 하라는 거예요”

“그 날도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어요. 컵을 닦는데 34개째 컵을 닦는 순간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중략) 이 조직 자체가 대부분 남자가 많았는데 사람들이 물을 먹고 컵을 그대로 놓고 간 걸 내가 여태 설거지를 했던 거죠.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는 정보통신기술이 급진적으로 발달했던 시절이었고 PC통신을 통해 사람들이 소통하기 시작했었다고 하는데요. 이 자각을 계기로 PC통신에서 여성활동가들과 모여 이야기하다 여성활동가 모임이 만들어졌고, 이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가 결성되었다고 해요.

여중여고여대를 나온 엄혜진 님은 대학에서 단과대 학생회장, 총학생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소위 ‘짱을 먹으면서도 따까리’ 일도 하였는데 졸업 후 사회에 나와 ‘낯설지 않은 낯선 경험’을 하게 되셨던거죠. 늘 주체적으로 살아왔는데 나의 경험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여성학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대학원에 가셨다고 해요.

“그런데 사실은 제가 생각했던 페미니즘 운동, 페미니즘 운동과 좌파 운동간의 관계, 그것을 내가 수행하고 실행한다고 하는 것, 내 운동의 전망으로 사고한다는 게 총체적으로 아주 갈등스럽고 고민스러웠던 순간이 찾아와요”

“내 삶과 생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주체로서 중심에 있음에도 내 운동을 내가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내 운동을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공부를 한다는 것은 자기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는 게 분명한 것 같고 특히 페미니즘이 그랬던 것 같아요. 왜 그 때 그 차이를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91학번 엄혜진 님의 생애경험은 자연스레 97학번 나영 님으로 연결되었어요.

< “나는 페미니즘에 어떻게 물들었나?”>

 

현재 ‘성적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SHARE)의 대표이신 나영 님은 “나는 페미니즘에 어떻게 물들었나?”를 제목으로 스토리텔링을 해주셨는데요. 아주 개인적이면서 당시 정치적, 사회적 맥락이 담긴 다양한 사진을 통해 나영 님의 인생의 결정적 순간들을 만나볼 수 있었어요.

“너는 영페미였니? 라고 물어보면 저는 내가 영페미였다고 말하기는 애매해요. 하지만 영페미들의 운동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것이 실질적으로 제가 페미니즘에 물드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물들고 있는 것 같아요”

가족관계, 고등학교 때 활동한 학생회, 문화잡지들, 대학 신입생 시절 새터에서 인연 등으로 이후 다양한 운동의 전선에서 운동의 흐름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해요. 호주제 폐지운동이 ‘어린 나영’과 가족에게 끼쳤던 크고 작은 영향, 학생운동에서 경험한 것들, 운동현장에서 마주하는 노동, 계급, 교육, 여성, 환경, 장애인인권, 성정치 운동 등이 페미니즘이라는 언어로 서서히 물들게하였다고 했어요.

“사실 저는 페미니즘을 정식으로 막 되게 공부를 하거나 이런 것도 아니었는데 일단 여성활동가라는 이유로 그런 곳에 불려 다니게 됐어요.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았어도 여성이니까 하라는 거예요. 부딪치면서 배우게 된 거예요. 실패들을 계속 거치면서 배웠던 것 같아요. 그 상처를 계속 쌓고 실패를 쌓고 하면서 이제 그 대응들을 통해서 페미니즘을 더 공부하게 되었어요”

“그것이 쾌락의 언어라고 하지만 거기서 평등한 관계는 없었고 그게 나중에 위험의 언어로 간 이 과정에 있는데 그래서 지금은 반성폭력운동 개념만 남고 섹슈얼리티는 없고… 이것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페미니즘 운동을 한다는 것이 관계와 평등이 없는 쾌락만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피해자와 위험의 언어로써만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정의의 문제와 페미니즘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많이 보여줄 수 있는 활동들을 더 조직하면 좋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영화 ‘인터스텔라’의 마지막 장면을 인용하여 페미니즘에 어떻게 물들었나를 설명하신 게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이런 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페미니즘에 계속 물들어왔던 과정들이 있었다고 봐요. 그 시기의 나에게 어떤 신호를 계속 보내주고 그 시기의 나를 계속 돌아보고 성찰하게 해주고 계속 무언가 말을 걸게 해주는 경험인 것 같아요. 그래서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어느 순간에 됐다’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그 경험들을 통해서 해왔던 것들이 과거의 나에게 말을 걸고 어렸을 때의 일들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중략) 많은 것이 페미니즘으로 해석되고 지금 저에게 굉장히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어요”

 

<‘차이’의 2000년대, 우리는 정말 ‘차이’를 ‘인정’했을까?>

마지막으로 90년대 대학을 다니진 않았지만 고등학교 때 이미 페미니스트 잡지‘이프’를 통해 페미니즘에 눈을 뜬 산소학번(O₂)이라 불린 02학번 임국희 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어요. 임국희 님은 현재 서울대여성학협동과정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며 경희대 강사로 활동하고 계세요.

“2000년으로 오면 학부 때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하면 우리 그때 진짜 우울하지 않았냐?(중략) 나는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20대 초반에 혈기가 왕성할 때잖아요. 말도 걸고 싶었고 누군가를 설득하고 싶고 내 운동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고. 그런데 아무도 그거를 안 해주는 거죠. 운동이 학생사회에서 완전히 헤게모니를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거기서도 한줌 밖에 안 되는 페미니스트들의 말을 안 들어주는 거였어요. 그래서 결국은 서로를 지지하는 자조모임처럼 페미니스트 운동들이 그런 방식으로 귀결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대학사회는 반성폭력 관련 학칙이 제정되고 제도화된 시기여서 공통의 의제가 사라진 상황, 그 다음에 뭘 해야 되지 라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고 해요.

“차이에 대한 이론들, 차이의 정치, 정체성의 차이를 긍정해야 된다, 여성들 안에서 내부의 차이에 대해 집중해야 된다, 엄청나게 강조를 하기 시작했던 시기인 거죠. 그래서 2000년대 PC(Politcal Correctness)라고 하면 결국은 수많은 정체성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게 곧 정치이자 윤리였던 거예요. (중략)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것에 대해서 인정해야 한다, 이게 차이다 라고 하는 것이 되게 강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의 차이를 정말 인정했을까? 계속 그런 고민이 드는 거예요”

우리가 같이 힘을 합칠 수 있다, 너무 좋은 말이죠. 그런데 이게 정말 연대로 모였을까? 저는 계속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자조의 시대라고 제가 감히 이름을 붙였는데, 같이 활동을 했던 분들은 ‘쟤 너무한 거 아니야?’라고 하실 수는 있겠으나 저는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2000년대는 새로운 의제를 발굴을 하기가 되게 어려웠던 거예요. 많은 게 달성이 됐죠. 그리고 나니까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너와 나랑 다른 것을 인정하자,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던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세 분의 생애사를 중심으로 한 경험을 듣고 참여자분들과 나눈 질문과 이야기들이 여전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90년대 초반의 시대적 상황이나 조건은 달랐지만 현재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닿아있는지, 현재는 당시의 어떤 영향과 수혜를 입었는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모두 다 자기가 살고 있는 현재는 되게 힘들고 암울한 것 같아요. 우리는 어떤 것을 발견할 것인가, 조금 힘들면 이렇게 앞에 좀 건너온 사람들한테 와서 기대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돈 내놓으라고 하기도 하고, 밥 사달라고 하기도 하고 이런 연대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 해요

로리주희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 센터장

이번 동창회를 통해서 시대는 다르지만 같이 싸우고 맞서는 경험들을 예전에도 했고, 앞으로도 함께 할 든든한 사람들이 있구나 라는 걸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길 바라요.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는 앞으로도 ‘여성운동의 계보를 잇는’ 시간을 만들어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나아갈 수 있는 ‘뜨거운 힘’을 느끼는 시간들을 더욱 열심히 만들어보려고 해요.

함께 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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